그림이야기-펌

Gauguin Gallery

쟝리 2010. 9. 6. 16:50

Gauguin Gallery

 














"원시(原始)의 세계를 찾아나선 예술가 "

 


 
Gauguin, (Eugene-Henri-) Paul 1848~1903

세잔느, 고흐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폴 고갱(Paul Gauguin : 1848-1903)은

유럽을 떠나 타히티 섬으로 가서 그 곳의 원주민을 그렸던 화가이다.

고갱은 유럽의 미술이 겉멋에 빠져 피상적으로 되어가는 위험에 빠져 있으며,

인간의 감성과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법을 빼앗아 버렸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는 야만적인 색채와 소묘만이

타히티의 때묻지 않은 자연의 아이들을 올바로

묘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느꼈다.

 

고갱은 원주민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물을 보려고 노력했다. 그는 토착민 장인들의 수법을 연구하고

때로 는 자신의 작품 속에 그들의 것을 묘사하기도 했다.

그는 자기가 그린 원주민의 초상을 원시적인 미술과 조화시키려 애썼다.

그래서 그는 형태의 윤곽을 단순화하고 넓은 색면에

강렬한 색채를 거침없이 구사했다. 프랑스 후기인상파 화가. 파리 출생.

1871년 학교를 마치고 상선(商船)의 선원이 되려고 하였으나

어머니의 사망으로 포기하고 증권거래소에서 일하였다.

 

73년에 덴마크 여인과 결혼하였는데, 그 후 다섯 아이의 아버지가 된 고갱은

동료의 권유로 이른바 <일요화가(日曜畵家)>로서 화필을 들었고,

화랑을 돌아다니면서 당시는 아직 세상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던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수집하였다. 76년 그의 풍경화가 살롱에서

입선되어 C. 피사로와 교제하게 되었고,

 

80년에는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려 작품전을 열기도 하였다.

직업 화가가 될 것을 결심한 그는 83년 이후 증권거래소를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하였다. 인상파 계열의 섬세한 필촉(筆觸)이

색채를 누비는 듯한 스타일이었던 그의 화풍이 갑작스런 변화를

가져온 것은, 마르티니크섬에서의 생활과 J.F. 밀레·A. 베나르 등과의

교제로 인한 것이라 여겨진다. 남프랑스의 아를에 있던 V. 고흐의 초대를 받아

그 곳에서 공동생활을 시작했으나, 고흐의 정신병 발작으로 헤어졌다.

 

브르타뉴에 돌아와 《천사와 격투하는 야곱(1888)》 《황색(黃色)의 그리스도(1889)》 등을 그린 후, 91년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떠났다.

타히티섬의 순수하고도 격렬한 <살아있는 색채>는 그를 완전히 매혹시켰고,

동시에 그의 화면을 장식적(裝飾的) 색면(色面) 구성으로 독특한 면을 띠게 하였다. 《마호리의 집》 《목욕하는 타히티의 여인(1891)》 《언제 시집가나》

《부채를 가진 여인(1892)》 《타히티의 여인들(1891~93)》 《다만 홀로(1893)》 《자바 처녀 안나(1893)》 《노아 노아(1897)》 등을 그렸다.

 

1901년 마르케사스제도의 하바오아섬으로 옮겼을 무렵에는 매독과 영양실조로

회복할 기력이 없었고, 1903년 《눈 속의 브르타뉴 풍경》을 끝으로 생애를 마쳤다. 후기 작품에는 《이제 싫어》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이며,

어디로 가나(1897~98)》 《붉은 꽃을 가진 가슴(1899)》

《해변의 기수(1902)》 등이 있다. 타히티의 풍물에서 취재한 강렬하고

장식적인 화풍은 그 뒤의 회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