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ckson Pollock
잭슨 폴록 (Jackson Pollock 1912~1956)
“나는 그림 속에 있을 때 나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 한다. 내가 어떤 행위를 저질렀는가를 알게 되는 것은,
그림과 친숙해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경과한 뒤에야 가능해진다. 그림은 스스로의 생명력을 지니기 때문에
나는 그림을 고치거나 이미지를 부수는 일에 대해 조금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저 나는 그런 식으로 그림이 완성되기를 허용해 줄 뿐이다.
나 자신과 그림의 접촉이 끊어지는 경우는 결과가 엉망진창으로 나타날 때뿐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림과 나 사이에 서로 주고 받는 완벽한 조화 관계가 성립되며,
이 때 그 그림은 괜찮은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잭슨 폴록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미국으로 미술계 중심이 옮겨지던 시기의 대표적인 추상표현주의 작가이다.
그는 붓으로 그리는 회화의 제작 방식을 벗어나 ‘액션페인팅'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냈다.
잭슨 폴록은 이전의 화가들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시도했다.
그는 캔버스를 벽에 세우는 대신 바닥에 눕혔다. 그리곤 페인트통과 붓을 들고 마음껏 캔버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서 느끼는 내면의 움직임에 따라 폴록은 기쁨이나 슬픔, 놀람, 분노 등을 표현했다.
하지만 보는 이들은 그의 그림 앞에서 한참을 고심하지 않을 수 없다.
잭슨 폴록의 추상 미술은 칸딘스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형태가 없다. 형태가 이미 녹아버렸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작품이 미술사에서 자주 거론되고 중요시 되는 이유는 작품 제작의 방법적인 측면에 있다.
적어도 그는 보이지 않는 추상의 세계를 새로운 조형언어로 그려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Shimmering Substance
1946 (280 Kb); Oil on canvas, 30 1/8 x 24 1/4 in;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뉴욕파라고도 불리는 추상표현주의는 40년대에 뉴욕에서 출발했는데 1950년대에 들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 운동은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을 빼놓고는 설명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위치는 중대하다. 폴록은 드립페인팅을 통해 주제의 중심에 서서 계획되고 정리된 작품이 아니라 거미줄같이 얽혀버린 심리적 미로를 표현했다. 캔버스에 물감을 떨어 뜨리거나 들이 붓는 ‘드리핑 기법'이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잭슨 폴록이 현대 미술의 대표주자로 주목받았던 이유는 단지 ‘드리핑 기법'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세련되지 못한 리얼리즘과 나약한 파리파의 모디니즘을 해방시키며 ‘추상표현주의'를 이끌었던 그는 회화의 중심을 파리에서 미국으로 옮기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1948년에 폴록은 뿌리기 그림들을 최초로 전시한다. 이 그림은 커다란 화폭을 바닥에 깔고 그 주위를 걸어다니면서 깡통의 물감을 붓거나 막대기에 묻힌 물감을 떨어드리는 것이다. 화면의 자국들은 화가의 움직임, 여러방향에서 화면을 향해 다가와서 팔과 손목의 행위의 기록을 의미한다. 이것은 어떤 시간에 행해진 행위 전체의 농촉이자 정지화면이다. 두터운 물감층의 표면성은 이젤페인팅과 벽화의 한계를 넘어서며 자체의 대상으로서 존재한다. 비평가 H 로젠버그는 액션 페인팅이라 명명하고 있다. 신화기의 자기정체성의 불안한 난폭함이 유희적이고 율동적인 우아함을 유발한다. 그는 작업중의 자신의 행위를 무의식적이라고 했으며 자동기술적인 면을 반영한다.
Controversy swirls over the alleged sale of No. 5, 1948 in 2006 for a reported $140 million
잭슨 폴록의 이 작품 No. 5, 1948 은, 지난해 1억 4천말 달러 (천3백억원)에 경매에 팔렸다.
Easter and the Totem
1953 (150 Kb); Oil on canvas, 84 1/4 x 58 in;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액션 페인팅의 대표작가 : 물감을 떨어뜨리는 드리핑 기법.
·캔버스 밖으로의 확대 : 캔버스로 뛰어드는 행위. 모래그림이나 동양의 서예에 친숙.
Number 8, 1949 (detail)
1949 (280 Kb); Oil, enamel, and aluminum paint on canvas; Neuberger Museum,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액션페인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일어난 회화 양식의 일종으로, 형식적인 면은 추상적이나
내용적으로는 표현주의적이라는 점에서 추상표현주의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액션페인팅의 창시자들은 2차 대전 후 유럽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전위 미술가들이었다. 현대 미술의 후원자인
페기 구겐하임이 ‘금세기 예술'이라는 화랑을 열면서 전위 미술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고,
잭슨 폴록을 비롯한 로버트 머더웰, 한스 호프만, 마크 로드코 등의 개인전이 이곳에서 열렸다.
특히 잭슨 폴록은 미리 계획되는 지시성이나 방향성을 갖지 않고 형상을 만들어 나가는 행위를 강조한
액션페인팅 기법을 개발했다.
Lavender Mist: Number 1, 1950. Oil on canvas, Oil, enamel, and aluminum on canvas;221 x 300 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잭슨 폴록의 그림을 대면하면 마치 색채의 뒤엉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묘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얼핏 보면 매우 단순해 보이는 색채의 뒤엉킴이다. 하지만 제각기 동떨어져 있던 이 색채의 혼합은
매우 역동적으로 파동을 일으킨다.
폴록의 그림은 수미터가 넘는 커다란 캔버스 위를 다양한 색상으로 뿌리는 작업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이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힘과 기술이 요구된다. 이 과정에서 잭슨 폴록은 색채를 쏟아부은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혼을 부어 놓은 느낌이다.
1960년을 정점으로 액션 페인팅은 대가들이 점차 죽음을 맞이하면서 쇠퇴기를 맞게 되고,
이는 60~70년대의 ‘색면파’ 회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
그는 1912년 미국 와이오밍주에 있는 농장에서 태어나 1930년 뉴욕으로 옮겨와 정착했다.
이 곳에서 그는 벽화에 관심을 갖게되며 초현실주의자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의 그림은 자신의 삶과 성격에 밀접한 상관성을 갖는다.
일찍이 일거리를 찾아 가출한 아버지의 부재, 다섯 아들을 거느리고 가난한 살림을 꾸려간 어머니는
완전히 무절제했으며 자식들을 멋대로 내버려 두었다.
무책임하고 버릇없이 자란 잭슨 폴록은 18세 때 미술 지망생이던 두 형을 따라 대책 없이 뉴욕으로 갔으나
세계 경제 공황 속에서 극심한 가난에 허덕이며 알코올에 빠졌다.
우울증과 자격지심 등의 콤플렉스와 끓어오르는 반항감은 그를 더욱 알코올 중독으로 빠지게끔 하였다.
그의 난폭하고 심술궂은 기질은 거리의 개들을 발길로 차기도 하고 목청이 터져라 욕지거리를 쏟아내는가 하면
파괴적 음주벽으로 곧잘 병원이나 경찰서 신세를 지곤 했다.
20대 중반부터 그는 알코올 치료를 위해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고 수없이 많은 융학파 정신과 의사를 거치며,
당시 미국 예술가들이 즐겨 썼던 "집단적 잠재 의식"에 매력을 느꼈다.
그는 보편적 진실에 이르는 길은 초현실주의 화가들처럼 사적(私的)인 환상과 잠재의식을 끌어내는 작업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는 멕시코 원주민식 벽화와 원시 미술과 신화를 차용한 피카소의 그림에 깊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20대 후반, 그의 그림들은 유치하고 조잡했다.
그 후 30세에 같은 그룹의 동인이었던 4년 연상의 여류 화가 "리 크레이스너"와의 만남은 잭슨 폴록에게
가장 큰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다.
화가로 성공하기 위한 현실적 센스를 갖고 있던 그녀는, 폴록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고 자신의 작업을
중단하면서까지 그에게 헌신적이었다.
폴록은 평생 처음으로 마음의 위안을 찾았고, 그림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녀는 폴록에게 페기 구겐하임을 소개했고 새로운 젊은 화가들과의 접촉을 알선함으로써 그에게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잭슨 폴록은 페기 구겐하임 전시로 미술계의 관심을 끌었고, 특히 몬드리안에게서
"신선하고 가장 독창적인 화면"이라는 호평을 받음으로써 큰 각광을 받게 되었다.
몬드리안의 호평으로 큰 각광을 받기 시작하게 된 작품 <스테노그래픽 그림>
이 그림의 선을 거부하는 독립적인 낙서 형태의 분산된 선 요소는 5년 후 물감을 들이부어 만든 선들의
추상 화면으로 발전된다.
1940년대 말 어느날 갑자기 그를 유명하게 해준 방울 떨어뜨리기 "드리핑(dripping) 기법을
발명하게 된데는 "앙드레 마송"의 그림들이 기여한 바가 크다.
*앙드레 마송 - 1924~27년 사이 자동기술법에 의한 회화를 창시.
"새로운 필요가 새로운 기법을 요구한다"던 그는, 이 시기부터 물감방울을 떨어뜨려 만든 그물들로
온통 뒤덮힌 작품들을 한다.
그의 그림들이 표출하는 끊이지 않는 힘은 그의 내적 리듬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는 왼손에 4리터 정도 되는 물감통을 들고 오른손은 붓자루, 막대기 등을 바꿔 들고 캔버스 가장자리를 구부린
자세로 춤추듯 왔다갔다하며 깡통의 물감을 들이 붓기도 하고 줄줄 흘리거나 막대기에 물감을 묻혀 뿌리기도 한다.
쉬지 않고 움직이며 즉흥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명 "액션 페인팅"이라 불리는 이러한 독특한 제작 과정은 다음
반세기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준다.
즉 자기 내부의 불안. 자격지심. 억압. 강박 관념을 뛰어넘어 오직 그 "과정"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겼을 때, 그 결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가장 자신을 닮은 독창적 화면이 만들어졌으며,
바로 그 점이 잭슨 폴록의 성공을 가져다주는 핵심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또한 그가 즐겨 듣던 재즈 음악은 작업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는 재즈야말로 미국에서 창조된 유일한 예술 형태이며 그림도 그런 음악이 주는 즐거움을 시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며 밤낮으로 재즈 음악에 푹 빠져있었다.
1951년부터 잭슨 폴록은 "드리핑" 기법을 조금씩 버리기 시작하고 종종 보다 전통적 회화기법인
나이프와 붓을 다시 사용하기도 하였다.
당시 그는 갈색이나 검정색의 에나멜 물감 자국들이 남기는 찬란한 데생들을 종이와 캔버스 위에
수도 없이 그려댔다.
이 작품들은 몸짓이기도 했고 암시이기도 했다.
때로는 완전한 추상이고 때로는 얼굴 모양을 띠기도 했다.
NO 7
초상화와 꿈
잭슨 폴록의 가장 특기할 만한 성공작은 <5번>, <14번> 식으로 번호가 매겨진 그저 반사작용적인 매듭이라 할 수 있는 흑백화들이라 하겠다.
그의 내면의 드라마나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서의 분열, 구상과 추상 사이에서 어느 것도 택할 수 없는 불가능성, 융(Jung)식의 정신분석학자들이 그에게 적용한 유력한 치료법도 어쩌지 못한 잭슨 폴록의 정신적 혼란 같은 것들이 모두 표현되어 있다.
그는 말기에 자신의 작품에 다시 제목을 붙이기 시작했다.
바다 회색(Ocean Greyness)에서 처럼 바다, 빛, 계절들, 곧 자신의 기상천외함을 일깨워 주었던 자연의 힘을 환기시키는 이름들을 다시 찾아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알코올 증세를 돌보아 주던 친구 주치의의 죽음으로 폴록은 다시 입에 술을 대기 시작했고 <푸른 기둥들>이라는 대작 한 점과 몇장의 드로잉으로 명맥을 유지해 가던 중 44세 되던 해 음주 운전 사고로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
<푸른 기둥들>
마침 폴록전을 기획하고 있던 뉴욕의 현대미술관은 이를 회고전으로 바꿔 유럽 순회까지 했으며
그의 그림값은 폭등하기 시작했다.
그가 죽기 바로 전 6천 달러이던 작품은 다음해 3만 달러에 거래됐으며 마지막 대작 <푸른 기둥들>은
15년 후엔 200만 달러에 거래됐다. 당시 현대 회화로서는 최고가였다.
반세기가 지난 그의 그림값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지만, 중요한 그림은 거의 시장에 내놓지도 않는 실정이다.
영화 배우 에드 헤리스는 잭슨 폴록의 전기를 보고 크게 감명받아 10년이나 준비하고 연구하여 완벽한
폴록이 되어 영화를 만들었다.
잭슨 폴록을 이해하는 아주 훌륭한, 예술성 높은 영화였다.
이 시대에 작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너무도 공감이 가는, 꼭 봐야할 영화라 생각된다.
특히, 폴록이라는 인물과 혼연일체가 되게하는 마지막 장면과 배경 음악은 압권이다.(개인적 느낌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개봉했으나 사실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흥행은 커녕 이틀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영화 <폴락>의 장면들
" 잭슨 폴락의 작품은 위조가 불가능하다 ." 라고 1982년 타임지의 비평가 로버트 휴즈는
선언했다.
이것은 예술가로서의 잭슨의 진위에 핵심을 찌르는 코맨트라 할수 있다.
" 그의 작품 Lavender Mist 는 가장 매력적이고 그의 분위기를 잘 말해준다....
폴락은 지저분한 핑크빛속에 작고 검은 줄무늬같은 무한대의 색조를 만들기 위해서
덜마른 에나멜 위에 다른 에나멜을 마블리하고 분리시켜서 생기는 패턴을 사용하였다."
" 1950년대 비평가 헤럴드 로젠버그는,전형적인 " 액션 페인터 "를 -- 그 안에서 인간과
펼쳐진 물질사이에서 서사적인 투쟁을 벌이는 -- 현대의 투기장으로 캔버스를 변형시키는
예술가로서 묘사했다.
그 과정은 탁월했다. 액션 페인터는 크고 용감한 제스쳐로써 대립과 카타르시스의
예술을 창조해 내었다.
거의 반세기 이후, 당대의 수사학적인 과도함에 대한 반응은 유행에 뒤떨어진 미국화단
의 승리로서의 추상주의의 관점과, " 과장된" 성격지어진 예술 형식으로서
액션 페인팅을 정립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렇지만 폴락이 미국 에술사에 준 영향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작품 보기
1938-41 Masqued Image
1942 |
|
1942 |
1942 |
1943 Blue (Moby Dick)
1943 The She-Wolf
1946 Eyes in the Heat
1946 Shimmering Substance
1946 The Key
1946 The Tea Cup
1947 Cathedral
1947 Full Fathom Five
1948 Detail of: Full Fathom Five
1949 Detail of: Number 8, 1949
1950 Lavender Mist: Number 1, 1950
1950 Autumn Rhythm: Number 30, 1950
1953 Ocean Greyness
1953 Easter and the To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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