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주의에 대한 12가지 질문
글 : David M. Gower
우리 삶을 돌아보면 질문이란 것이 재미있는 경우가 많습니다(물론 답을 안다면). 그래서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벧전 3:15)는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고무적이며 또 도전이 됩니다. 여기서 소망이라 함은 성경의 모든 가르침을 포함합니다(골 1:23).
우리는 성경적인 칭의의 교리를 가져야 합니다. 물론 이 명령은 직접적으로 교회의 목사나 집사 혹은 교회 학교 교사들에게 적용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들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주와 구세주로 영접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베드로전서는 종이나 아내나 남편들에게 주는 지침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3장 8절과 그 이후의 내용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합니다. 대답할 것을 예비하라는 지침도 여기에 속합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모든 지체는 주님의 은혜와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목사님을 구실로 삼아 이러한 자신의 의무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물론 목사는 목양 사역의 일부로서 각종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합니다. 누구든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자유롭게 목사님을 찾아가서 물을 수 있으며 그렇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본인이 성경을 공부하지 않고 목사님만 찾아가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는 데 필요한 연습을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곁에 성경을 잘 아는 목사님이 있다고 해서 거기에 안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어떤 부인이 논쟁이 되는 교리 하나를 갖고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은 그 교리에 대해 근본주의자들이 제시한 몇 가지 견해를 정리해 놓은 건전한 책 한 권을 추천했습니다. 그러자 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여러 견해가 아닙니다. 그냥 정답을 말해 주세요. 그럼 믿겠어요!" 이러한 부인의 태도는 신약성경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레아 사람들의 칭찬할 만한 태도와 비교됩니다. 사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조차도 성경을 통해 비추어 보고 상고했었습니다.
엡 4:11과 요일 2:27 말씀은 멋진 균형을 이룹니다.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대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전도자로, 어떤 이들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 45:1) "그러나 너희에게는 그분에게서 받은 기름부음이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 기름부음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며, 또 진리요 거짓이 아니니, 그 기름부음이 너희를 가르친 그대로, 너희가 그분 안에 거할지니라."(요일 2:27)
하나님은 교회에 목사와 교사를 주어 믿는 이들을 가르치고 양육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만인 제사장인 각 그리스도인에게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믿는 이들이 성경을 읽고 공부할 때 그들의 마음을 비추어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일년 전보다 우리 믿음에 대해 더 잘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매우 어려운 질문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런 질문 중 몇몇은 성경을 잘 알고 성경대로 가르친다는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종종 은사운동을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일반 그리스도인들이 깜짝 놀랄만한 질문을 던집니다. 은사주의자들은 방언을 믿으며 다른 표적 은사들(기적을 행함, 병 고침 등)이 오늘날에도 유효하며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것들을 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1960년 캘리포니아의 밴누이스(Van Nuys)에서 시작된 이 은사운동은 불길처럼 번져나갔고 최근의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 그리스도인들의 19퍼센트 가량(2900만 명)이 자신을 은사주의자 혹은 오순절주의자로 여기고 있다고 하니 가히 놀랄만한 성장입니다. 그리고 이 조사에 따르면 이런 은사주의자들의 21퍼센트가 뱁티스트(침례교도)라고 합니다.
은사주의 운동은 주요 프로테스탄트 진영뿐 아니라 카톨릭 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초교파 운동입니다. 여기에는 복잡한 교리 설명이 없고 사람들이 표적이나 이적을 중심으로 모이며 각 사람이 믿는 바(정통이든 비 정통이든)에 대해서는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공식적인 회원명부도 없습니다. 단지 은사를 강조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기도하고 같이 공부하며 그러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것들을 찾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은 자기들이 기존에 다니던 교회(근본주의, 복음주의, 자유주의 교회 등)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며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자신들과 같은 체험을 하도록 부추깁니다.
자 여기 몇몇 은사주의자들, 특히 성경을 믿는 교회 출신의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일반 그리스도인들은 이같은 질문들에 대해 성경대로 답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은사주의자들이 비은사주의자들에게 묻는 열 두 가지 질문을 다루고자 합니다. 이는 여러분이 여러분 안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는데 분명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질문 1 벧전 2:24에서는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속죄의 한 부분인 병 고침을 인정하지 않습니까? [TOP]
☞ 참으로 도전적인 성격의 질문입니다. 비은사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채찍에 맞아야겠군요. 여기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채찍은 분명히 그분의 죽음과 실제 처형 중에 당하신 채찍질을 말합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여금 고침을 받도록 채찍을 맞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은사주의자들의 결론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이처럼 고침을 가져왔다면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건강해야 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그럼 다시 벧전 2:24로 돌아가 봅시다. "그분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짊어지셨으니, 이는 죄들에 대하여 죽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서 의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 여기에 나오는 "고침"은 현대적인 의미에서 신체의 치유를 연상케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이것이 성령님께서 육체적인 치료를 두고 하신 말씀이었냐 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 단서가 여기 있습니다.
1. 성경 전체에서 이 "고침"(healing)이란 단어는 여러 종류의 고침을 나타내는데 쓰였습니다. 주로 육체적인 치유를 나타내었지만 상심한 마음을 달래는데도 쓰였고(눅 4:18), 마귀의 억압을 제거한다는 뜻으로도 쓰였으며(행 10:38), 또 죄악된 행실을 버리거나(히 12:13)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구할 때에도 이 "고침"이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이런 의미에 대한 또 다른 단서는 벧전 2:24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2. 여러분이 잘 아시는 "stick"이란 단어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단어의 뜻도 여러 가지입니다. 그런데 문맥에서 빗자루, 성냥개비, 혹은 접착제 같은 단어가 함께 나온다면 아마 해당되는 뜻을 문맥을 통해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의 이 "고침"이라는 단어의 뜻도 이런 식으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벧전 2:24절 전체 내용이나 또 전후의 문맥에 육체적인 치료를 연상하게 할 만한 단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 죄가 여러 번 언급된 것으로 보아 이 고침이 영적인 치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전체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메시지는 이렇게 요약될 수 있습니다.
우리(독자 여러분)는 죄를 짓지 않으신(2:22,23)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야 합니다(2:21). 이러한 높은 수준의 행실이 가능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을 짊어지심으로 우리가 죄들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2:24). 우리는 습관적인 죄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잃어버린(구원받지 못한)양처럼 방황하지 않고 여러분의 영혼의 목자에게 돌아왔기 때문입니다.(2:25)
이처럼 여기서의 "고침"(heaing)은 영적인 치료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기의 고침을 단순히 육체적인 치료로 본다면 글의 흐름과 전혀 맞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3. 벧전 2:24의 마지막 구("그분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와 25절 말씀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유명한 예언의 말씀인 사 53장 5,6절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범법함으로 인하여 상처를 입으시고 우리의 불법으로 인해 상함을 입었도다. 그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
여기에 나오는 "고침"은 분명히 영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의 범법과 불법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적대관계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죄의 치유는 환자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입니다(이사야 1장). 대언자 이사야가 다룬 환자(이스라엘 민족)는 죄 많고 불법에 싸여 있으며 주님께서 버리신 악인들로 가득합니다(1:4). 하나님은 이 환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너희가 더 많이 맞으려느냐? 너희가 더욱더 반역하는도다. 온 머리가 병들었고, 마음은 온통 기진하여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처와 멍과 곪은 종기들 뿐이니"(1:5,6). 이 환자의 병세가 신체의 부위별로 묘사되고 있지만 사실은 영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위대한 의원, 그것도 영적인 의원으로 오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죄인들과 함께 먹는 주님을 꾸짖자 주님은 자신이 왕진을 나온 의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왕진을 나오신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는 것입니다(마 9:10-30). 정확한 때에 위대한 의원께서 영적인 치료의 일을 마치시고 갈보리 언덕으로 오르시어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즉, 손수 내리신 처방에 필요한 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죽으심으로 그분을 믿는 누구나 죄에서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질문 2 성령'침례'와 성령'충만'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TOP]
☞ 은사주의에서는 보통 이 둘을 서로 번갈아 가며 사용하며 성령의 단일한 사역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둘을 분명히 구분하기 때문에 은사주의자들이 그 차이를 묻는 것입니다. 성령침례와 성령충만을 공부해 보면 이 둘이 단순히 구분되는 정도가 아니라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각각을 살펴보고 나중에 둘을 비교해 보면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해 질 것입니다.
성령침례에 대한 구절은 신약에서 11번(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 행 1:5; 11:16; 롬 6:1-7; 고전 12:13; 갈 3:26-28; 엡 4:5; 골 2:12) 나옵니다. 이 중 다섯은 예언의 말씀인데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와있습니다. 이 다섯 구절 모두 성령침례를 미래 시제로 다루고 있는데 이는 성령침례가 당시에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역사임을 보여 줍니다. 과거 시제도 있는데(행 11:16) 이 말씀은 오순절을 되돌아보며 하나님께서 그 날 이루신 성령침례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다섯 구절은 서신서에 있으며 모두 성령침례의 본질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약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무엇이 성령침례인가? "침례"(밥티스마)라는 단어는 원래부터 "잠그다" 혹은 "담그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즉 "하나의 사물을 다른 데로 옮겨놓다"는 의미가 있지요. 성령침례는 이 일이 영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침례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일어납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를 성령님 안으로 푹 잠기게(baptize) 하십니다. 여기서도 침례라는 단어가 쓰이며, 이는 곧 그를 성령님의 세계로 옮기심을 의미합니다. 둘째, 성령님께서 믿는 자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푹 잠기게(baptize)하십니다. 즉 그를 우주적 교회라는 세계로 옮기신다는 말입니다. 이 두 가지 측면을 보여주는 구절이 바로 요 1:33과 고전 12:13입니다. 비교해 보십시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침례를 주라고 하신 분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와 누구 위에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요1:33) "우리가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나 매인 자나 자유한 자나 모두 한 성령을 통해 침례를 받아 한 몸 안으로 들어왔고 또 모두 한 성령을 통해 마시게 되어 한 성령 안으로 들어왔느니라."(고전 12:13)
2. 언제 성령침례가 일어났는가? 성경은 성령침례가 성도가 처음 구원받았을 때 일어나는 경험의 일부라고 가르칩니다. 성령침례는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모셔들이고 거듭날 때 일어납니다. 따라서 성령침례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불가결한 관계에 있습니다. 이같은 관계는 갈라디아서 3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내용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아들이고 침례를 받았으며 그리스도에 속한 자로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라는 것입니다.
3. 누가 성령침례를 받는가?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령침례를 받았다고 가르칩니다. 성령침례가 구원받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당연히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침례를 받은 것입니다. 성경도 이를 명확히 말하고 있습니다. "다 한 성령을 통해 침례를 받아 한 몸 안으로 들어왔고"(고전 12:13). 즉 어떤 사람이 구원받았다면 그리스도안으로 침례를 받았다는 것을 말하기에,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지 못한 자는 구원받지 못한 자입니다. 따라서 성령침례를 받지 못한 신자라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고린도에 있던 몇몇 그리스도인들의 육적인 모습이 공공연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성령침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4. 성령침례를 사모해야 하는가? 성경에는 성령침례를 추구하라는 명령도 없고 심지어 그같은 언질조차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왜 이리 조용한 한 걸까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미 성령침례를 받은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침례가 구원받는 순간 이루어지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가장 복된 소유가 된다면 굳이 따로 추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령충만은 신약에서 15번 등장합니다(눅 1:15,41,67; 4:1; 행 2:4; 4:8,31; 6:3,5; 7:55; 9:17; 11:24; 13:9,52; 엡 5:18). 그 중 14 구절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나오는데 이런 경우에는 단순히 어떤 개인이나 모임이 성령으로 충만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말씀에서만 성령충만이 명령으로 나와있습니다.
엡 5:18은 성령충만을 가장 잘 말해주는 구절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에는 지나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이 말씀은 충만이 무엇이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의 통치하에 있다 혹은 무엇에 의해 지배당한다"는 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진리는 술에 취하는 것(술에 지배당하는 것)과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을 비교한 데서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이 말씀은 성령충만이 언제 일어나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충만함을 받으라"는 단어는 현재 시제입니다. 즉 현재에 진행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를 다시 쓰자면 "계속 충만하라" 정도가 되겠지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믿는 이들이 계속적으로 성령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시제라고 해서 성령충만이 한 번 이루어지면 영원히 지속된다거나 혹은 살면서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성령충만은 유지되어야 하며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 그때는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 이 말씀은 누가 성령충만함을 받아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령충만함을 받으라는 명령은 모든 믿는 이에게 적용됩니다. "충만함을 받으라"는 명령은 "술취하지 말라"라는 명령처럼 복수를 향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충만의 명령은 특정 소수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그러나 실제 이 명령에 순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또 모두 동시에 충만함을 받기도 못합니다. 성령충만의 명령은 개인적인 성격을 지닙니다. 주님께 순종하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도 있지만 주님께 불순종하여 충만함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은 하나님께 순종하고(롬 6:13; 12:1) 성령의 권능 안에서 걸을 때(갈 5:16) 얻을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성령침례와 성령충만의 차이점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성령침례는 단 한 번 일어납니다. 성령충만은 여러 번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성령침례는 거듭나는 순간에 일어납니다. 성령충만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며 일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신자들은 항상 성령침례를 받은 상태에 있지만 성령충만은 믿는 자가 순종하는 그 때에 이루어집니다. 성령침례는 명령이 아닌데 이는 하나님께서 맡으신 것이기 때문이고, 성령충만은 명령인데 이는 믿는 이가 따라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침례는 믿는 자의 신분과 관련이 있고 성령충만은 믿는 자의 경험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령침례는 사람을 그리스도안으로 옮기는 것이고 성령충만은 사람의 행동을 그리스도와 같이 만드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와 같이 성령침례와 성령충만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질문 3 성령침례(세례)가 그리스도를 믿은 뒤에 일어나는 두번째 축복이 아니라면 왜 사도들은 구원받은 후 몇 년 뒤에 성령을 받게 되었을까요? [TOP]
☞ 은사주의자들은 보통 성령침례가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순간에 일어날 필요가 없다고 믿습니다. 즉 성령침례는 그 후에 - 기간이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음 -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늦추어진 성령침례를 소위 "두 번째 축복"이라고 부르며 영생의 축복에 버금갈 만큼 놀라운 영적 체험으로 봅니다. 질문에 나온 사도들의 예는 두 번째 축복으로서의 성령침례를 증명해 준다고 알려진 것입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사도들은 오순절 사건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구원받았고 심지어 그리스도의 사역자로 활동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성령님의 침례를 경험한 것은 사도행전 2장에 이르러서입니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분명히 많은 이들이 이러한 사도들의 예를 우리도 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추론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이 한 가지 빠뜨린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오순절을 전후하여 하나님의 운행하심에 큰 변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순절이 교회가 탄생한 날이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대의 시작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날에 믿는 자들을 향한 성령님의 사역은 새로운 방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성령님의 활동은 이미 지상에 있었고, 성령님은 심지어 창 1:2의 창조 사역에도 계셨습니다. 구약에서 그분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진리를 계시하고 어떤 사람에게 특정한 직무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또 각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몇몇 사람 안에 거하셨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성령님의 내주는 모든 신자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으며 또 영속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성령침례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우리 세대만이 가지는 독특한 것이며 바로 오순절에 시작된 것입니다.
성령님의 우주적이고 영속적인 내주하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전 세대에서 성령님은 장막을 만드는 자나 재판관, 대언자(선지자), 왕과 같은 사람들에게만 임하셨습니다. 이때 성령님의 내주는 단순히 그들의 구원을 보여준다기보다 그들이 맡은 직무를 이행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맡은 바 소임을 마치기나 불순종으로 인해 자격을 박탈당하면 자연히 성령님께서도 떠나가셨습니다.
가령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을 봅시다. 처음에 그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성령님께서는 사울 안에 거하셨습니다(삼상 10:1-6). 그러나 사울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자 주님의 영께서는 그를 떠났습니다(삼상 16:14). 이 때문에 다윗도 밧세바와 간음하는 죄를 범한 후에 주님께서 자신의 영을 거두어가지 마시도록 부르짖었던 것입니다(시 51:11). 다윗의 기도는 실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두고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기도는 적절하지 않은데, 이는 성령님께서 믿는 모든 자 안에서 그가 죽을 때까지 거하시기 때문입니다(롬 8:9).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사역하실 동안에도 성령님은 활동하고 계셨지만 아직 그들에게 "주어지지는" 않은 상태였습니다(요 7:39).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기 직전에 성령의 사역이 곧 바뀌게 되리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주님은 그때까지만 해도 제자들과 함께 혹은 그들 가운데 계셨던 성령님께서 곧 제자들 안에 임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17). 주님은 자신의 죽음과 매장, 그리고 부활이 있은 뒤 승천하실 때에 성령을 보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6:7-14).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예언하신 대로 오순절 날 성령님께서 임하셨습니다(행 11:15,17). 이 사건을 시작으로 성령님께서 모든 신자 안에 영구히 거하게 되신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주시는 성령침례를 생각해 봅시다. 성령께서 침례를 주신다고 했을 때 그것은 믿는 자를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옮기는 것을 말합니다(고전 12:13). 그리스도의 몸은 우주적 교회의 또 다른 명칭입니다(엡 1:22,23). 교회는 오순절에 시작되었으며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성령님께서 개개인을 교회 안으로 옮기는 일도 교회가 존재한 후에야 시작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결국 성령침례는 오순절 이전에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승천하실 때 성령침례를 미래의 사건으로 말씀하신 것을 주목하십시오(행 1장). 오순절이 오기 10일전만 해도 성령침례는 현실이 아닌 하나의 예언이었습니다.
사도들이 성령침례를 받은 것은 그들이 구원받은 후 수년이 지난 후의 일인데 이는 단순히 오순절 이전에는 성령침례가 없었고 사도들이 오순절에 이전에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율법 시대에 태어나신 것처럼 율법 시대에 구원을 받았습니다(갈 4:4). 그런데 그들이 구원받은 후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성령침례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성령침례는 사도들의 두 번째 축복으로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성령침례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받는 순간에 주어지는 축복이 되었습니다. 사도들의 체험은 독특한 것인데 이는 그들이 두 세대 사이의 과도기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도들의 예를 우리에게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질문 4 고린도전서 14:39은 분명히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는데, 왜 당신은 교회에서 방언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까? [TOP]
☞ 오늘날 복음주의자들 중에는 본인 스스로는 방언을 하지 않고 심지어 오늘날 방언이 있다고 믿지도 않지만 교회에서 방언을 하는 것은 괜찮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 그런 은사주의의 관행을 교회에서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런 단호한 입장 때문에 우리는 옹졸하다거나 사랑이 없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좀더 심각하게는 이것이 고전 14:39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방언이 그칠 것이라고 말합니다. "타언어(방언)도 그칠 것이며(Whether there be tongues, they shall cease)"(고전 13:8). 단지 방언이 언제 그칠 것인지에 대해서 확실히 이야기하고 있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방언이 언제 그치게 될지 알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먼저 고전 13:8-12를 잘 살펴보십시오. 여기에는 세 가지 임시적인 축복이 나옵니다: 대언, 방언, 지식. 분명히 대언(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대신 말하는 것)도 없어지고 지식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두 동사의 성격상 - 즉 "없어진다"(done away)와 "사라진다"(vanish away) - 대언과 지식은 외부의 어떤 힘에 의해 끝나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 외부의 힘이란 바로 "완전한 것"입니다. 완전한 것이 오면 대언과 지식은 그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완전한 것"을 신약 성경의 완성으로 보기도 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일 "완전한 것"이 신약성경이라면 대언과 지식은 오래 전에 끝난 것입니다. 9절은 부분적으로 알고 대언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10절은 완전한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것이란 틀림없이 부분적인 것의 완성입니다. 따라서 완전한 것은 지식과 대언의 완성 혹은 완성된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가 될 것입니다.
자 이제 또 다른 임시 축복인 방언(타언어)에 대해 살펴봅시다. 방언을 묘사하는데 사용된 동사인 "그친다"의 성격상 우리는 방언이 앞에 나온 대언이나 지식처럼 외부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끝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방언(타언어)이란 단어는 고전 13장 9절과 그 이후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를 볼 때 방언은 스스로 그치게 될 것이며, 심지어 완전한 것이 임하므로 대언과 지식이 끝나기도 전에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완전한 것을 신약성경의 완성으로 이해한다면 방언은 그 이전에 그치게 되었을 것입니다. 완전한 것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해하는 분들도 여전히 방언이 그분의 재림 때가 아니라 재림 이전에 그칠 것이라는 사실에 봉착하게 됩니다.
고전 14:21,22은 방언이 종결된 시기를 아는데 도움이 되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방언은 믿지 않는 유다인들을 위한 표적이었습니다. 이사야서의 인용구를 보면 외국어 방언의 표적이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심판의 개념이 고린도서에도 적용된다면 방언의 은사도 믿지 않는 유다인들을 향한 표적이라 할 수 있으며, 곧 앞으로 있을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말해주는 역할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주후 70년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진노를 부으셨으니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파괴하였고 이스라엘 민족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따져보면 방언은 주후 70년에 지식과 대언은 주후 90년에 그 목적을 다 이루고 그친 것입니다. 역사를 공부한 사람은 방언이 2세기나 그 이후의 정통교회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쉽게 압니다. 그러나 몇몇 이단들은 계속해서 방언을 실행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나 집사의 자격에도 방언은 없습니다(딤전 3장; 딛 1장). 만일 방언이 교회 시대 전체에 필요한 은사였다면 분명 본으로써 양무리를 이끄는 자들은 마땅히 이 은사를 소유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방언을 주장하며 이에 대해 설교하는 목사들의 대부분이 자신은 그리 하지 않거나 하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고전 14:39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방언으로 말함을 금하지 말라." 이렇게 말한 이유는 방언이 당시 고린도인들에게 유효했고 실제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은사를 오용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로 인해 방언 전부가 금지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경고가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방언은 그친 상태에 있습니다. 오늘날 방언은 과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방인들의 전도를 금하신 명령(마 10:5,6) 만큼이나 교회와 무관한 사항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방언의 은사가 그쳤고 대부분의 교회에서 그 목적(믿지 않는 유다인들을 향한 표적)을 거의 달성할 수 없다는 성경적인 이유에서 우리는 은사주의 관행을 우리 교회 안에서 허용하지 않습니다. 또한 방언을 하는 사람과 방언을 하지 않는 사람이 같은 교회에 있게 되면 늘 불화가 일어납니다. 게다가 오늘날 방언은 성경이 말하는 실행의 규정을 거의 지키지 않은 채 행해지고 있습니다.
질문 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데"(히 13:8), 왜 당신은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방언을 하지 않습니까? [TOP]
☞ 은사주의자들은 보통 이 구절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일을 항상 같은 방식으로 하신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즉 어제(사도 시대) 하신 방식을 오늘도 그리고 영원토록 유지하신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예수님께서 사도 시대에 방언의 은사를 주셨다면 오늘날에도 동일한 은사를 주실 것이고 이 일은 인류 역사가 지속되는 한 계속된다는 말이 됩니다. 그럼 과연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코 변경하지 않으실 이 위대한 진리를 간과한 것일까요?
은사주의자들이 히 13:8을 해석하는 방식에는 몇 가지 명백한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방언의 은사가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신 것처럼 영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방언이 그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고전 13:8). 그 정확한 시기를 결정함에 있어서는 불일치가 있을지 모르나 방언이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만은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바입니다. 성경이 분명 방언을 일시적인 것으로 말하기에 방언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해야 합니다.
둘째는 은사주의자들이 "어제"를 사도시대로만 국한한다는 것입니다. "어제"는 아담이나 노아, 아브라함, 모세, 왕과 대언자(선지자)들이 살았던 시대도 될 수 있습니다. "어제"가 오순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거나 예수님의 지상 사역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억측입니다. 이 구절을 방언의 은사와 연관지으려는 사람은 자연 "어제"에서 구약을 제외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 혹은 심지어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도 방언의 은사는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역사를 보더라도 방언의 은사는 오순절 이전에는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대답을 할 사람도 있을 지 모릅니다. "'어제'가 그렇게 최근에 시작되었다면 '영원'은 이미 오래 전에 끝났겠네요"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에 타당성이 없는 것은 어제의 시작을 사도행전으로 보고 그 이전의 인류 역사를 빠뜨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은사주의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봅시다. 우선 히 13:8의 바른 해석이 필요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코 변치 않으신다는 것을 말할 뿐이며, 그분과 관련된 어떤 것이 그대로 남아있는지를 정확히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은사주의자들은 그분의 활동이나 역사하시는 방식조차도 변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에 기초하여 방언의 은사도 오늘날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운행 방식이 변한다는 것은 성경을 보면 곧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 중 어떤 것은 변화 정도가 심해 다른 직무(administration)를 나타낼 때도 있습니다. 이렇듯 심각하게 차이가 나는 직무를 일컬어 우리는 세대(dispensation)라고 합니다. 앞에 언급한 대로 오순절 이전에는 방언의 은사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대가 바뀌면서 하나님은 방언의 은사를 주셨고 그 때에 하나님의 역사를 운영하는 방식이 바뀐 것입니다. 이를 보아도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다루시는 방식이나 인간에게 요구되는 사항들이 늘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에게 있어 항상 동일한 것은 무엇일까요? 이는 히 13:8을 그 문맥에 비추어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 시대의 레위의 제사장 체계보다 월등하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레위의 제사장 체계를 바꾸셨습니다. 히브리서가 쓰여질 당시 히브리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버리고 유다교가 헛되이 가지고 온 레위의 제사장 체계로 되돌아갈 위험에 놓여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변화와 일관성을 모두 발견합니다. 좋은 변화는 하나님께서 옛 언약(구약) 대신에 새롭고 좋은 언약(신약)을 가져오셨다는 것이고 나쁜 변화는 유다인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버리고 유다교로 돌아가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도 일관된 것이 있었으니 바로 그리스도라는 분이십니다.
히 13:7-9은 히브리서 전체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주고 너희를 다스리는 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따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여러 가지 이상한 교리에 끌려 다니지 말라. 은혜로 마음을 굳게 함이 선한 일이요, 음식으로 할 것이 아니니, 음식에 전념하는 자들에게 음식이 유익을 끼치지 못하였느니라."(히 13:7-9)
7절은 히브리인들에게 살아 생전에 그리스도께 신실했던 자기들의 이전 지도자들을 상기시켜줍니다. 비록 이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지만 따라야 할 본을 남기고 갔습니다. 8절은 히브리인들이 항상 신실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로 변하지 않으시는 그리스도입니다. 비록 선배들은 갔지만 그리스도는 여전히 계십니다. 따라서 현재 우리들도 계속 신실해야 하는 동일한 근거와 명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9절은 적용입니다. 히브리인들은 결코 그리스도에게서 떠나 유다교로 돌아가서는 안되었습니다. 율법과 복음을 합하려는 시도가 "여러 가지 이상한 교리들"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이러한 거짓된 교리들을 피하고 참된 은혜의 교리에 붙어있어야 했습니다. 이 은혜가 그들의 마음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견고하게 해줄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특정 음식(희생으로 성별된 음식물)을 먹는 의식이 히브리인들의 마음을 세워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경영 방식을 바꾸셨기 때문입니다. 즉, 성전, 레위인들의 의식, 레위의 제사장 체계는 더 이상 하나님의 활동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끝내신 것을 지속하는 것에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식은 바뀌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 사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의 인격, 본질, 위치는 동일합니다. 또한 하나님이며 사람이신 그리스도는 불변합니다.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변치 않으신다는 이 위대한 진리를 잊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변치 않는다는 것이 그분의 인격과 본질에 관련된 것이지 그분의 역사와 경영 방식까지 똑같다는 것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히 13:8절이 방언의 은사가 지속됨을 보증하는 구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질문 6 당신은 방언이 하늘의 언어가 아니라 사람의 언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것을 증명해 보이겠습니까? [TOP]
☞ 저명한 언어학자들이 조심스럽게 연구한 결과 현재 은사주의자들이 행하고 있는 방언은 인간의 언어가 가지는 논리적인 구조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즉 거의 항상 영문 모를 말뿐이라는 것입니다. 은사주의자들은 방언의 은사가 화자가 모르는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거나 흔히 하늘의 언어, 천사의 언어라고 말하는 황홀경의 소리들을 말하는 능력이라고 주장합니다.
실제 방언(타언어)으로 말한 예가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 나와 있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은 흔히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의 은사는 외국어였고 고린도전서의 경우는 하늘의 언어였다고 주장합니다. 또 비은사주의자들은 방언의 은사가 늘 사람의 언어였고 따라서 은사주의자들이 행하는 대부분의 언사(utterance)는 하나님의 은사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자 그럼 이 두 가지 상반된 주장을 검증해 보도록 하지요.
성경에서 "방언"(타언어: tongue(s))이라고 번역된 단어의 그리스 원어는 "글로싸"(glossa)이며 이것은 말 그대로 사람의 입안에 있는 혀; 사람이 구사한 언어; 특별한 지역의 사투리 즉 방언; 이해할 수 없는 말 등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같은 정의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대신 "글로싸"(glossa)가 성경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살펴보면 각각에 해당되는 바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방언으로 말한 예가 사도행전에서는 세 번 나옵니다. 첫 번째는 행 2:4-11의 오순절 사건이며, 여기서 4절은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대로 성령님을 기다린 사람들이 성령님이 임하시매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한 내용입니다. 6, 8절을 보면 이 다른 언어가 사람의 언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명절날 여러 곳에서 예루살렘으로 온 사람들을 포함한 군중들이 놀란 것은 "각 사람마다 자기 나라의 말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군중들은 물었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우리가 태어난 곳의 언어로 들음이 어찌된 일이뇨?" 그들 각 사람이 태어난 곳의 명단이 다음에 등장하는데 각각은 그 지역의 언어를 보여줍니다. 바로 이 사건은 사도 행전의 나머지가 어떻게 전개될지 보여줍니다.
두 번째는 행 10:44-48절에 나오는 고넬료(코르넬리우스)의 집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때 일어난 기적도 사도행전 2장 동일하게 "타언어로 말하다"로 표현되었습니다. 물론 여기서도 이 단어가 행 2장의 경우처럼 사람의 언어를 가리키는데 사용된 된 것으로 보입니다. 더욱이 성령님의 선물이 "이방인들 위에" 임하셨다는 언급이 있습니다(45절).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하며 그 일을 자신이 이미 경험한 바 있는 오순절 사건과 비교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처음에 우리에게 임하신 신 것처럼 그 집에 있는 이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셨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다"라고 했습니다(행 11:15, 17). 베드로가 우선적으로 언급한 것도 성령님이라는 인격이지 방언의 나타남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이라는 분은 그분이 스스로를 나타내지 않는 한 인간의 지각으로는 감지될 수 없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자신들에게 나타났던 동일한 것(방언)을 보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동일한 선물을 주셨다고 결론지은 것입니다.
세 번째는 행 19:1-7입니다. 여기서 일어난 기적도 "그들이 타언어로 말하더라."로 표현되었습니다. 물론 여기서도 그 말이 행 2장이나 10장의 경우처럼 사람의 언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고전 12-14장에서도 방언의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실제적인 논쟁이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사도행전에서 나온 방언이 사람의 언어라는 데는 모두가 동의하리라고 봅니다. 반면에 고린도전서의 방언이 하늘의 언어나 혹은 천사의 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의 본문은 사도행전처럼 분명히 이것이다라고 보여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 나오는 방언을 인간의 언어라고 생각하고 그 본문을 읽어보아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고, 고린도전서와 사도행전의 관계를 고려해 본다면 아무래도 인간의 언어라는 결론에 더 가깝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는 사도 바울이 기록했고 사도행전은 의사 누가가 기록했습니다. 바울과 누가는 가까운 동역자요, 친구사이였습니다. 누가는 바울의 전도여행 때 그와 두루 동행했습니다. 틀림없이 두 사람은 서로의 글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순서에 따르면 사도행전이 고린도전서보다 먼저 앞섭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의 사건은 고린도 교회가 세워지기 전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실제 사도행전은 고린도전서보다 약 5년 늦게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하며 거기에 바울이 이미 사용했던 방언이란 단어를 사용했을 때는 틀림없이 동일한 선물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방언이 누가복음을 읽는 사람들에겐 생소하고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했기에 누가는 그 선물이 인간의 언어라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바울은 굳이 방언의 본질을 설명하려 들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독자들이 이미 그 선물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사람의 언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바울과 누가가 동역자였다는 것과 바울의 기록이 우선한다는 것, 누가가 "알지 못하는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묘사할 때 바울이 쓴 것과 같은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 등과 같은 사실들은 고린도전서의 방언이 사람의 언어라는 것을 강력히 뒷받침해줍니다. "분명한 소리"(distinct sounds, 고전 14:7-11)라는 말의 개념도 14장 21절의 인용과 14장 22의 설명을 볼 때 인간의 언어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말한 바 "사람들과 천사들의 말"(tongues of men and angels, 고전 13;1)도 문장이 보여주는 대로 하나의 가정 하에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바울은 자기가 사람의 말(the tongues of men)을 한다고 했고(14:18), 실제 모든 지식과 믿음을 가지며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었다고 말했지만, 자신이 천사의 말을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방언의 은사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인간의 언어를 학습과정이 없이도 구사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래서 킹제임스성경은 고린도전서의 방언을 "알지 못하는 언어"(unknown tongue)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은사주의자들의 방언은 어떤 종류의 인간의 언어도 아니므로 성경이 말하는 바 참된 방언의 은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질문 7 당신이 마귀들을 내쫓을 수 없다면 어떻게 마귀들을 다룹니까? [TOP]
☞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마귀들을 강력히 그리고 단호하게 내어 쫓으셨습니다. 오늘날 미국에서도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면서 마귀를 내쫓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엑소시스트"라는 영화에서 나오는 마귀와 활동과 엑소시즘(축사, 마귀 쫓아내는 일)이 세인들의 관심을 끌은 적도 있었습니다.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사탄과 마귀들이 실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탄이 이 세상의 신이며 공중 권세 잡은 자요, 세상의 군주라고 믿습니다. 또한 다른 타락한 천사들 곧 성경에서 종종 마귀라고 불리는 무리들이 있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고 사탄의 일을 도우며 선한 천사들의 역사를 방해하고 사람들을 지배하려함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진정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정사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두움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을 대적하는 것임"을 믿습니다(엡 6:12).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이 강력한 악의 세력을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요?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들을 내쫓아야 할까요? 아니면 마귀를 쫓는 일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도들이 선포한 말씀을 확증하기 위해 초대 교회에만 주어진 일시적인 표적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마귀를 다루어야 하는가에 관한 프로그램이 교회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 주어졌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프로그램의 중심은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신약 성경에는 우리가 마귀를 쫓아야 한다는 명령이 없습니다. 심지어 그 일이 우리가 따라야 할 본보기라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어떤 이가 잘 말한 것처럼, 우리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체험해야지 사도들의 체험을 가르쳐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마귀를 쫓는 것과 관련하여 사도들이 가르친 바는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6장은 신약성경에서 영적인 전쟁을 다루는 구절 가운데 가장 훌륭한 구절입니다. 여기서 과연 마귀를 쫓아내는 것(즉 축사)에 대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오히려 이 말씀은 마귀의 공격을 무력화시킬 방어용 갑옷과 사탄과 마귀들을 패주시킬 공격용 무기를 자세히 열거하고 있습니다.
마귀들을 다루는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께서 절대적인 권능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악한 영들의 적수가 못됩니다. 악한 영적 존재들은 힘과 능력 면에서 사람보다 월등합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권위로 마귀를 대항하거나 마귀의 유혹을 거절하려하는 것은 마치 장난감 총으로 전함을 침몰시키려는 어린아이의 시도와도 같습니다. 그러나 "너희 안에 계신 분께서 세상에 있는 그보다 더 크심이라"(요일 4:4)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그분에게 너무 어려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분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반대로 마귀들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록 마귀들의 능력이 크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한도 내에 머무르며 그 힘을 행사하는 것도 하나님께 제한을 받습니다(욥의 경우처럼). 따라서 우리는 마귀들이 하나님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이 시대의 믿는 자 모두 안에 내주하십니다. 승리하기 위해선 그분께 돌아가야 합니다.
마귀들을 다루는 두 번째 단계는 마귀들의 공격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적의 공격 계획을 미리 아는 전략가는 승리하기 위해 어떻게 방어해야할지 계획을 세우고 잘 준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의 공격에 대해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벧전 5:8). 그리고 성경은 마귀의 공격이 간교하고 속임수로 가득하다고 말하며(엡 6:11) 동시에 우리가 이런 사탄의 전략에 대해 모르는 바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고후 2:11). 그렇다면 이같은 전략이 무엇일까요?
악한 세력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심하길 원하며 또한 말씀보다 이성을 우선시 하길 원합니다(창 3장). 그들은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놓기 위해 자연적인 질병의 고통과 죽음을 이용합니다(욥기; 히 2:14). 악한 세력들은 악한 생각을 불어넣으며(요 13:2) 이것을 매우 그럴듯하게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거기에 말려들도록 합니다. 그들은 또한 "육"을 사용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타고난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가 우리에게서 완전히 떠나는 것은 우리가 죽을 때나 휴거를 받을 때 이루어 질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흔히 "육"이라고 부릅니다. 육은 우리를 유혹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만들며 마귀는 이를 이용하여 우리의 삶에 관여하려 합니다. 우리가 육에다 자신을 내어줄 때 마귀는 어느 특정한 부분에서 우리를 이용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육을 통해 사탄이 우리 안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고후 2:6-11; 엡 4:25-29).
주님의 군사라면 마귀가 이러한 경로로 자신을 공격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공격을 경계하며 대항할 준비를 갖출 때 우리는 성공적으로 그 공격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마귀의 영향력을 이겨내기 위한 최선의 길은 날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마귀들을 다루는 마지막 단계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대항하는 것입니다. 엡 6:10-12는 바로 이를 위한 병기고입니다. 사탄과 마귀들의 거짓말에 대항하려면 하나님의 진리를 전장에 투입해야 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를 속이는 거짓말을 간파하고 물리칠 수 있습니다. 사탄과 마귀들은 사악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무장한 채 전장에 들어가 악을 파악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사탄과 마귀는 두려움을 자아냅니다. 이에 우리는 하나님의 평화를 들고 전장에 들어가 우리를 악으로 이끄는 두려움을 이겨냅니다. 사탄과 마귀는 의심을 심습니다. 따라서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탄과 마귀의 공격은 주로 우리의 마음에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 적을 간파하고 적의 사악한 생각을 거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사탄을 물리치기 위한 공격 무기인 검, 즉 하나님의 말씀을 휘두릅니다. 사탄은 우리의 결단이나 열심에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도망갑니다. 물론 말씀을 기억하고 바르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전신갑주를 원활히 움직이게 하는 윤활제가 바로 기도입니다. 이상이 우리가 마귀를 다루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신약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질문 8 왜 기적의 은사가 오늘날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TOP]
☞ 우리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오늘날 기적을 행하실 수 없다거나 기적을 행하시지 않는다는 얘기가 절대로 아님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단지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오늘날 기적의 은사를 주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즉, 은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 기적적인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물론 하나님 자신은 기적을 행하실 수 있으며 또 행하십니다. 더 확실히 말씀드리자면 이 시대에는 특별한 은혜를 받아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치리하기 위해 정상적이고도 자연스러운 양식 혹은 법칙을 갖고 계십니다. 이러한 양식은 너무도 질서정연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것을 흔히 자연의 법칙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때로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특별한 방법으로도 움직이십니다. 이렇듯 변칙적인 운행 방식을 보통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말하자면 기적이란 흔치 않은 하나님의 역사 방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적이 흔히 일어날 거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기적이 아니라 일상사가 될 테니까요. 지구가 일정한 각도로 회전하여 태양이 매일 아침 떠오른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권능을 놀랍게 보여줍니다. 하지만 성경은 태양과 지구 사이의 도는 과정을 기적으로 분류하진 않습니다.
성경은 인류의 역사에 세 가지 커다란 기적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 기적은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에 일어났습니다. 이 시기는 율법이 주어질 때로부터 시작되어 약 10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두 번째 기적이 일어난 것은 엘리야와 초기 대언자(선지자) 시대였습니다. 구약 성경의 상당부분이 이때 주어졌는데 이 기간은 약 15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마지막 기적의 기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사역하실 때와 사도들의 활동하던 때에 일어납니다. 이 때가 바로 신약 성경이 주어진 시기이고 약 7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어셔의 연대기(Usher's dates)에 따르면 성경은 지금까지의 인류역사가 약 6000년임을 보여주며,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라면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략 이같은 역사가 옳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적이 발생한 시기는 그 중 5% 정도인 320년에 불과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33년간의 지상 생애 동안에 단 3년 동안만 기적을 행하셨다는 사실인데 이는 그분의 전체 생애의 9퍼센트에 불과합니다. 어떤 이들은 기적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일상적인 삶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결코 성경은 이런 기대에 부응하지 않습니다.
위의 내용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문제를 제기하는데, 그것은 사도 시대에 주어진 기적의 은사가 교회 시대 전체에 걸쳐 지속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의 목적을 제대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이같은 주장에 타당성이 없음을 쉽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기적의 본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다른 일시적인 목적에 사용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목적이었습니다. 기적을 말할 때 쓰인 세 단어가 이 사실을 입증해 줍니다.
먼저 기적은 "능력 있는 일들"로 불리는데 이는 행위 뒤에 숨겨진 권능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때론 기적이 "이적"(wonders) 즉 "놀라운 일"로 불리며 이 때에는 기적을 목격한 자들의 반응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이뿐만 아니라 기적은 "표적"(signs)으로도 불립니다. 이는 기적을 행하는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임을 보여주고자 하는, 이른 바 기적의 첫째 목적을 강조할 때 쓰였습니다. 만일 기적이 능력 있는 일이나 이적에만 국한되어있다면 그건 단순히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은 항상 하나님의 일꾼과 말씀의 참됨을 보여주는 표적입니다. 앞에 언급된 기적들이 많이 나타난 시기가 성경 말씀을 주신 시기와 비슷한 시기라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들은 나의 대변인이니 그들의 말을 들으라. 내가 표적으로 그들의 말을 확증해 주지 않느냐?"
신약 성경은 특히 기적을 표적으로 봅니다. 요 20:30,31과 10:37,38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이 자신이 메시아임을 보여주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믿고 구원받도록 하기 위함이었음을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 된 권위를 실제 자기가 행한 기적의 권능을 빌어 입증하려 했습니다(고후 12:11,12).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진실성을 확신한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고 그분을 목격한 증인들이 기적으로 자신들의 증거가 참된 것임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히 2:3,4).
기적의 취지가 곧 전달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신뢰를 갖도록 하는 것이었기에 하나님의 계시가 중단될 때 기적의 은사도 그쳤으리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기적의 은사는 초세기 이후로는 찾아볼 수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은사주의자들은 오늘날 기적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교회가 육신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적이 그 본래의 목적을 달성했기에 하나님께서 그 은사를 거두어들이신 것으로 봅니다. 우리의 논거는 기적의 목적에 따른 것입니다. 더욱이 신약 성경은 우리가 기적의 은사를 추구하거나 그것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기적을 행하실 수 있으며 행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시대에서 지속되는 현상으로서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특정 개인에게 주지 않으셨습니다.
질문 9 왜 병고침의 은사가 오늘날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TOP]
☞ 은사주의자들은 대개 하나님께서 모든 신자가 건강한 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모든 순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탈없이 잘 지내도록 몇몇 사람에게 치유(병고침)의 은사를 주셨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을 공부해 보면 건강이 나쁜 것이 때로는 어느 특정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가령, 고후 12:7-10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예).
우리가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은 치유의 은사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통해 병을 고치시는 일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치유의 은사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신체적인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사도들, 그리고 사도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소수만이 이런 능력을 지녔습니다. 이들은 온갖 종류의 병자들에게 나아가 병자들을 즉각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치료하였습니다. 심지어 몸 전체를 완전히 고치기도 했습니다(죽은 자를 일으키는 것).
사실 치유의 은사는 하나님에게 온 것이며 따라서 거기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 은사는 하나님의 대변인으로 새로운 계시를 전하는 자가 진짜임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기적적인 능력의 일부입니다(히 2:3,4). 그렇습니다. 치유 받은 자는 고통과 불편함을 면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치유의 은사도 다른 기적들처럼 성경 역사의 어느 특정한 때에 일어난 표적이었습니다. 치유하는 자(healer)가 땅에 걸어다닌 시간은 인류 역사 전체를 통해 극히 짧았습니다. 심지어 그 때에도 하나님을 믿는 참 신자들이 병이 났을 때 찾아가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치유의 은사를 가진 자가 없을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즉 그 당시에도 치유의 은사를 받은 자가 매우 드물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치유의 은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의 "형제요, 동역자요, 동료군사인" 에바브라를 고칠 수 없었습니다(빌 2:25-27). 바울은 선교 여행때 자기와 동행한 트로피무스를 고치지 못하고 아픈 채로 밀레도에 남겨 두었습니다(딤후 4:20). 바울은 자기의 후계자 디모데를 고칠 수 없었고 대신 일반적인 처방을 디모데에게 권장했습니다. 심지어 바울은 자신도 고칠 수 없었습니다(고후 12:7-10).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두 가지 일을 했습니다. 먼저 이런 상황에 대해 하나님께 기도했고 적절한 약을 사용했습니다. 때로 하나님은 원하는 것과는 달리 부정적으로 응답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치유의 은사가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를 전하는 사람을 신뢰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신 것이지 결코 그리스도인들의 건강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나 다른 성도들이 처한 상황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하나의 본이 됩니다. 즉, 아프면 기도하고 의학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약 5:14에서도 볼 수 있는데 여기서도 아픈 그리스도인이 장로들을 청하여 기도를 부탁하고 처방으로 기름을 부을 것을 가르칩니다. 이때 기름을 바르는 것은 종교적인 의미가 아닌 하나의 의학적인 처방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기름을 바른다는 의미로 쓰인 그리스어가 "크리오"(chrio)- 즉 그리스도 곧 "기름부음 받은 자"에서 나온 단어로 거룩한 기름부음을 뜻함 - 가 아니라 "알레이파오"(aleipho) - 즉 몸을 문지르는 것 - 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우리가 치유의 은사를 바라야 한다고 나와있지 않습니다. 만일 치유의 은사가 교회시대에도 계속 된다면 약 5:14 말씀은 무의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몸이 확실하게 고침을 받는 것은 실로 내세에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들뿐 아니라 성령의 첫 열매를 소유한 우리 자신들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 삼으심,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 8:23).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의 몸을 구속하실 것이며, 우리는 그분께서 영화로운 몸을 주사 이 죄가 육체에 미치는 영향에서 벗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날 치유를 잘한다고 크게 소문이 난 소위 크리스천 치유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엉터리 치유사들이 고친다는 질환들은 실제 병이기는 하지만 대개는 마음에서 생긴 것이나 외적인 영양에 의해 악화된 것입니다. 희생자들은 단지 생각을 달리함으로써 - 가령 치유함을 받았으므로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생각함으로 - 상태가 완화되는 체험을 합니다. 몇몇 질환은 순전히 상상에서 나온 것인데 이런 것들은 생각만 바꾸면 얼마든지 "치료"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치유 사례를 연구해 보면 그 증상은 완화되었으나 실제 상태는 그대로인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치유사가 귀머거리나 복합골절 환자나 선천성 기형아를 고친다거나 죽은 자를 일으킨 경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진짜 치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만이 치료할 수 있는 종류의 것입니다.
설사 오늘날 능력의 치유사가 나타난다 해도 우리는 그런 치유사를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으로 자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마귀의 심령술에 빠졌다가 그리스도께로 돌아온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악한 세력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합니다. 성경도 분명히 사탄이 대환란 기간 동안 그러한 기적을 행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살후 2:9,10; 계 13:11-15). 마귀도 자신을 빛의 천사로 나타낼 수 있기에 이는 결코 놀랄 일이 아닙니다(고후 11:14,15).
치유는 표적의 은사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를 전하는 자의 정통성을 입증하는 사람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자 치유의 은사는 곧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 이 시간에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 대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예나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보더라도 치유는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일반적인 관행이 아닙니다. 사도행전과 에베소서를 비교해 보더라도 치유의 은사가 이미 신약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급격히 감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교회 시대에는 모든 질병에 대해 기도와 의학적인 처방을 의지해야 하며 이것만이 병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기본자세입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뜨거운 기도에 응답하사 자신의 뜻 안에서 기적적으로 병을 고치실 수 있으며 지금도 고치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특별히 그런 은사를 받아 손만 대면 병을 낫게 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질문 10 당신은 성경이 완성되었으므로 오늘날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직접적이고 특별한 계시가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것을 입증해 보이겠습니까? [TOP]
☞ 많은 은사주의자들이 오순절주의의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오순절주의는 성경에 나오는 대언 - 즉 직접 말씀을 받아 대신 전하는 것 - 의 은사와 대언자가 오늘날에도 있다고 믿습니다. 성경의 대언자는 본래 하나님의 메시지를 말하는 사람입니다. 때론 그 메시지가 미래의 있을 일을 담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선포하는 것은 항상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대언자는 하나님께 직통 계시를 받아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말합니다. 고전 14:29,30은 대언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보여줍니다. "대언자들은 두 세 사람이 말하고, 다른 사람은 판단할지니라.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어떤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사람은 잠잠할지니"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차례로 진리를 전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직접 계시를 주신다고 믿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신약성경이 완성되면서 하나님께서 이 세대에 알리고 싶은 모든 일을 알리셨다는 것입니다. 현재 주님은 기록된 말씀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즉 주님은 기록된 말씀에 빛을 비추사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고 말씀을 적용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이런 우리의 입장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요? 인간적인 생각이지만 만일 하나님께서 신약성경의 끝부분에 친히 추신을 다셨다면 일은 간단해 질 것입니다. 가령 "이로써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직접적인 계시는 끝이 났다"라든지 아니면 단순히 "끝"이라고 말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주님은 간접적으로 동일한 내용을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장은 참으로 놀라운 구절입니다. "지나간 때에는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언자들을 통해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1,2a) 이 말씀은 마지막 날들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계시의 전부가 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두 구절은 하나님께서 진리를 보여주신 두 가지 방법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지나간 때에 주님께서 한 방식을 쓰셨고 이 마지막 날들에는 또 다른 방법을 쓰십니다. 먼저 주님은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지나간 때에 주님께서 개별적으로 계시와 영감된 기록을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때마다 하나씩 계시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각각의 계시들은 단편적이고 불완전했습니다(물론 전체로는 완전함). 이 구절의 그리스어 어순을 보면 하나님께서 지나간 때에 이런 방식으로 말씀하셨으나 지금 마지막 날들에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방식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나간(in the past)"에 쓰인 그리스어는 "낡은"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오래되었음을 나타내는데 쓰이는 그리스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시간적으로 오래되었다 혹은 오래 지속되었다는 뜻을 지닙니다. 예를 들어 포드사의 썬더버드 자동차는 시간적으로 오래된 모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쓰인 단어는 사용하기에 오래되었다, 즉 낡았다, 닳았다, 바꿀 때가 되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가령 경찰차나 택시가 낡은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히 1:1,2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조금씩 계시를 주셨던 기간이 다른 기간 - 계시의 수여방식이 전혀 다른 기간 - 으로 바뀌려 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이 마지막 날들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더 이상 대언자를 통하지 않습니다. 만유의 상속자요, 세상들을 만드신 분, 하나님 자신의 정확한 형상이신 그분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월등한 분이 월등한 계시를 가져오십니다. 그 풍부함과 완전함에 있어 월등한 계시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땅의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계시가 되십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그분이 사람에게 가장 완전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져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자신의 가르침을 기록할 준비를 하셨습니다. 그분이 자신의 가르침을 기록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약속하심으로써 그렇게 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기억나게 하셨고 3년이라는 기간동안 미처 제자들이 받지 못한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완성하셨습니다(요 16:12-15). 역사를 보면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70년 내에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기록은 사도들과 그 측근들이 했습니다.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의 인격이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완전한 메시지를 기록으로 남긴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에 부수적으로 두 가지 사항을 더할까 합니다. 계시록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의 마지막 장이 되기에 적합합니다. 계시록은 현재와 미래, 그리고 영원 세계를 꿰뚫고 있습니다. 계시록을 읽다보면 이것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의 결론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둘째로 마지막 일들의 책(계시록)의 결론부를 주목해 보십시오. 거기에는 이 책의 말씀에 그 어떤 것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된다는 언급이 있습니다. 물론 이 책이라고 했을 때 그것이 먼저는 성경 전체가 아닌 계시록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이 위대한 성경전서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 책이 마지막 계시라는 것을 담고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2000년 역사동안 대체로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추가적인 계시가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고 그렇게 믿지도 않았다는 역사적인 사실 자체가 성경이 완성되었음을 분명히 해줍니다.
질문 11 신약시대에 방언이 성령침례를 보여주는 표적이 아니라면 성령침례를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TOP]
☞ 은사주의자들이 흔히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당신은 성령을 받았습니까?" 그렇다고 대답하면 보통 다음과 같은 질문이 따릅니다. "그럼 방언의 은사를 받으셨겠네요?" 두 번째 질문은 방어의 은사가 성령침례를 보여주는 확실한 표적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성령침례를 받았다면 그는 방언을 해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을 반박하기 위해선 간단히 고린도전서만 보아도 됩니다. 말씀을 살펴 볼 때 고린도 교회는 방언의 전문가들만 모인 곳 같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방언의 은사가 그 어떤 다른 교제보다 더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이 그렇게 널린 퍼진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은 분명히 방언의 근본 목적이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새로운 메시지가 참된 것임을 증명하는데 있다고 말합니다.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 모인 많은 유다인들은 방언의 은사를 목격했고, 이에 예수님에 관한 메시지가 참된 것임을 알았습니다. 방언의 은사는 고넬료(코르넬리우스)와 그의 집안 사람들에게도 임하여 참으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도 구원하신다는 인상을 유다인들에게 심어주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리스도를 믿는 유다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도 자신들과 같이 대하시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같은 방언의 목적을 고전 14:22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타언어들은 믿는 자들이 아닌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표적이 되나니" 바로 전 구절에서 바울은 이사야서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내가 다른 언어들과 다른 입술을 가진 사람들로 이 백성[유다인]에게 말하리라. 그럴지라도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불신], 주가 말하노라" 따라서 고린도 교회에 방언이 널리 행해진 것은 특별히 유다인들에게 표적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유다인들을 향하여 독특하게 그리고 널리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아마도 성경 시대에 고린도 교회만큼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목이 대상이 된 교회는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고린도에서, 그것도 유다인들 사이에서 처음 시작했습니다(행 18:1-3). 바울은 관례대로 유다인들의 회당에서 먼저 말씀을 선포했습니다(행 18:4). 실라와 디모데가 곧 바울과 합류했고 고린도의 유다인들에 대한 특별한 짐을 지게 되었습니다(행 18:5). 그런데 마침내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믿지 않는 유다인들이 복음 선포에 반대하여 일어났고 사도들과 믿는 무리들은 회당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행 18:6). 이제 그들은 복음 전도의 초점을 이방인들에게 맞추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그때 세워진 고린도 교회는 유다인들의 회당 바로 옆에 있는 디도 유스도의 집에서 모였습니다(행 18:7). 따라서 믿지 않는 유다인들은 분명히 고린도 교회를 눈여겨보았을 것입니다. 교회 모임이 바로 자기네 옆집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회당장 그리스보가 자기의 온 집안과 함께 주님을 믿었습니다"(행 18:8). 이에 믿지 않는 유다인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네들의 지도자가 변절하여 교회로 가버린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그리스보의 뒤를 이은 차기 회당장이 어떻게 하든 유다인들이 회당에서 교회로 가는 것을 막으려 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사실 교회 자체를 금하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소스데네가 그리스보의 자리를 이을 자로 뽑혔습니다(행 18:17). 물론 성경은 소스데네가 복음의 확산을 막으려는 본연의 책임을 어떻게 수행했는지에 대해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최종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서신의 서두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 바울과 우리 형제 소스데네는..." 하나님은 또 한 명의 유다인 회당장을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고린도 교회는 유다인들의 회당 바로 옆에서 유다인들에 대한 특별한 부담을 안고 태어났습니다. 교회 모임은 바로 회당 옆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교회의 지체들 중에는 전직 유다인 회당장이 두 명이나 있었습니다. 분명히 고린도의 믿지 않는 유다인들은 이 교회를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특별한 조치로서 이 교회에 방언의 은사 즉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게 표적으로 작용할 은사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고린도 교회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으로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고전 12:29-30에서 일곱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그 중 하나가 "모두 다 타언어(방언)들로 말하겠느냐?"입니다. 어쨌든 일곱 가지 질문에 대한 공통된 답은 "아니다"입니다. 모든 고린도인들이 방언으로 말하지 않은 이유는 방언이 하나의 은사이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은사들을 나누어주시기 때문입니다(고전 12:11). 모든 은사를 다 갖춘 성도는 없습니다.
고린도인들이 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 모두가 받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령침례입니다.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 안에 들어왔습니다"(고전 12;13). 앞에 나온 두 가지 사실이 모두 동일한 장에서 가르쳐지고 있음에 유의하십시오. 성경은 이 신약 시대에 방언의 은사가 성령침례를 보여주는 확실한 표적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성령침례는 모든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이 받았으나 모두가 방언으로 말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질문 12 사도행전의 체험들이 교회 시대에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를 말해주십시오.[TOP]
☞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앞에 나온 내용에 대개 다 들어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방언과 기적과 치유의 은사가 실제 행해졌던 때의 일을 담고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이러한 은사들은 표적의 성격을 지니며 하나님의 새 메시지 곧 신약을 전하는 자가 진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약 성경이 완성되자 표적의 은사들은 그 소임을 다했고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에서 사도들과 그 동료들이 보여주었던 기적의 은사들은 교회 시대의 일반적인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도기의 것을 가지고 현재의 교리로 삼으려 하기 때문에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마태복음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다룹니다. 많은 사람들이 혼동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구약의 율법시대에 태어나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바로 십자가 사건 이후부터 비로소 신약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데서 생깁니다. 아직도 예수님은 유다인들만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한편 사도행전은 유다인들의 교회에서 이방인들의 교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역사하였던 모세의 법을 성취하시고 끝내셨습니다. 대신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두셨고 이는 교회 가운데 역사하게 되었습니다. 이 교회는 물론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처음 세운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구약의 성전 예배 등을 행했고 사도행전의 뒷부분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여전히 하나님께 정결례를 드리는 등 율법에 따른 관행들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다시 말해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방식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자동차에서 기어를 바꾸셨는데 그 백성들은 그 속도에 따라가지 못했다고 볼 수 있지요. 이에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새로운 운행 방식을 받아들이도록 일시적이나마 자신을 특별하게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여러 가지 은사를 통해서 말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은 이런 과도기 역사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런데 은사주의자들은 사도행전을 교회 시대 전체의 청사진으로 봅니다. 그래서 사도 시대의 교회와 똑같은 모습의 교회를 세우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익한 일입니다.
첫째, 사도 행전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들이 서신서에 나타난 역사들과 늘 같지는 않다는 점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가령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은 죄지은 자를 쳐서 죽이심으로 즉각적인 교회의 징계를 보여주셨습니다(행 5:1-11). 그러나 서신서에서 하나님은 지역 교회가 죄지은 자를 겸손하게 기도하며 징계하라고 말합니다(고전 5:1-5; 고후 2:5-11; 갈 6:2; 살후 3:6-14,15; 딛 3:10,11). 오늘날의 지역 교회는 앞에 나온 두 가지 경우처럼 차이가 있을 때에는 과도기의 사도행전의 예가 아니라 모든 것이 확정되고 이방인 교회를 향하여 주신 에베소서를 따라야 합니다.
둘째로 사도행전이 오늘날 교회의 청사진이 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사도 행전의 기록된 방식대로 일률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은사주의자들은 성령침례의 교리가 사도행전에 나오는 둘째 축복이라는 의견을 지지하려고 합니다. 이처럼 성령님의 강림이 늦어진 경우가 사도행전 2장과 8에 등장합니다. 2장의 경우는 위에서 줄곧 설명을 했습니다. 제자들이 믿은 지 몇 년 후에 성령침례를 받은 이유는 그들이 성령침례와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기 전에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8장의 사마리아인들은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올 때까지는 이 축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그때는 이미 믿는 유다인들과 믿는 이방인들의 두 부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에 따라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의 순서로 전파되어야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의 기록을 보면 성령님의 나타나심 즉 방언이나 표적으로 나타나심이 매번 이루어진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도행전은 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구원받은 후에 방언 등과 함께 임하는 두 번째 축복 즉 성령침례에 대해 일관적인 사례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침례를 구원의 일부, 즉 구원받는 즉시 신자의 몸을 가득히 채우시고 하나님의 전으로 삼는 성령의 역사로 보는 에베소서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또한 은사주의자들은 사도행전을 의지하여 성령을 "기다리는" 교리를 지지하려고 합니다. 사도행전 2,8,10,19장 중 오직 2장만이 믿는 자들이 성령을 기다린 사건을 싣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제자들은 성령님을 간청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예언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주실 때를 단순히 기다린 것입니다(행 1:4,5,8). 서신서에는 성령을 받는 것, 심지어 성령을 기다리는 것에 대한 지침도 없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방인 교회를 향한 이 시대의 우리의 지침서는 서신서입니다.
사도행전은 하나님께서 과도기에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입니다. 서신서는 교회 시대 전반에 걸쳐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교리와 실천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의 내용을 바르게 분별하기 위해 신약 성경 전체를 주의 깊게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신서에서 말한 것과 같은 지역 교회를 세우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일하십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그 권능에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더 넘치도록 풍성하게 행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엡 3:20). 이 위대한 부활의 권능(엡 1:19-21)은 기적 같은 일을 해낼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엡 3:21).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순종하고 기도하며 움직일 때 하나님이 이같은 일을 행하시는 것이지 사도행전에 나오는 기적의 은사를 구할 때 하시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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