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야기-펌

루벤스 ③

쟝리 2010. 10. 22. 20:59

안트웨르펜 시대의 제단화들

 

1607년 여름에는 곤차가 궁정 사람들과 함께 이탈리아 해변휴양지인 산피에르다레나로 가서 제노바 귀족들의 화려하고 장엄한 초상화를 계속 그렸다. 만토바에서는 봉급이 항상 연체되었고 만토바의 화가가 아닌 국제적 화가로 출세하고 싶은 야심도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다른 후원자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루벤스는 부유한 제노바 사람으로 교황의 은행업무를 맡아주던 야코포 세라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그는 루벤스가 발리첼라에 있는 산타마리아 교회 중앙제단 위에 그림을 그리는 중요한 주문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동시에 루벤스는 페르모의 오라토리오 수도회를 위해 〈목자들의 경배 Adoration of the Shepherds〉라는 제단화도 그렸다. 1608년 10월에 형한테서 어머니가 위독하니 빨리 안트웨르펜으로 돌아오라는 연락을 받고 귀향했지만 어머니는 루벤스가 도착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The Entombment
1611-12
Oil on wood, 88 x 66 cm
National Gallery of Canada, Ottawa

 

 

플랑드르에 영원히 정착한 그는 1609년 10월에 안트웨르펜의 주요 인문주의자인 얀 브란트의 딸 이사벨라와 결혼했다. 그는 궁정 초상화가가 되었을 뿐 아니라 주요한 종교화가로도 활약했다. 안트웨르펜의 신트왈부르가 교회를 위해 그린 〈십자가 세우기 Erection of the Cross〉, 안트웨르펜 대성당을 위해 그린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Descent from the Cross〉, 겐트의 이웃 도시에 있는 성바본 대성당을 위해 그린 〈성 바본의 기적〉 같은 바로크 양식의 제단화들을 통하여 루벤스는 플랑드르의 가장 중요한 화가로 자리를 굳혔다. 그런 명성 덕분에 루벤스는 플랑드르 궁정이 있는 브뤼셀이 아니라 안트웨르펜에서 살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는 또한 안트웨르펜 화가들의 길드가 정한 규정에 따르지 않아도 되었고, 그래서 제자나 조수들을 길드에 등록시키지 않고도 마음대로 고용할 수 있었다. 1611년경 루벤스는 그의 제자가 되고 싶어하는 지원자들을 100명 이상이나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Descent from the Cross
1612-14
Oil on panel, 421 x 311 cm (centre panel), 421 x 153 cm (wings)
O.-L. Vrouwekathedraal, Antwerp

 

 

안트웨르펜으로의 귀환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에 루벤스는 플랑드르를 통치하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섭정들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황금 족쇄'에 묶이게 되었다. 그가 자신을 위해 직접 지은 집은 안트웨르펜의 자랑거리인데, 그곳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와 고대 로마 시대의 그림과 조각, 카메오(부조로 새긴 보석 따위의 장신구), 동전 및 보석 등으로 가득 찼다. 그는 자신의 골동품을 소장하기 위해 개인 신전을 지은 셈이었다. 이탈리아 건축에 대한 그의 열정은 〈제노바의 궁전들 Palazzi di Genova〉이라는 출판물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1622년에 안트웨르펜에서 출판된 이 판화집에는 르네상스 시대에 지은 제노바의 궁전들이 소개되어 있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이탈리아 건축설계를 격찬했는데, 안트웨르펜 예수회 교단이 새로 짓는 웅장한 신트카를로스보로메오 교회에서 이 정신을 실천했다. 그는 플랑드르 건축가인 피테르 호이센스(1577~1637)와 함께 이 교회의 정면과 종탑 및 건축의 모든 세부를 마련한 주요설계자였다. 루벤스는 또한 이 교회의 실내장식도 담당하여, 천장화의 밑그림이 될 유화 스케치를 그렸다.

 

 


Assumption of the Virgin
1626
Oil on panel, 490 x 325 cm
O.-L. Vrouwekathedraal, Antwerp

 

 

 

 


루벤스는 북유럽 바로크의 주도적 인물로서 회화가로서 그의 영향력은 건축가 베르니니보다 훨씬 지대했다. 그는 플랑드르 어느 매너리스트에게 훈련받았고 고전, 르네상스 미술의 전통을 두루 섭렵하고 당대의 카라바지오, 카라치의 예술을 역시 흡수했다. 그는 생애에 모든 영예를 누리며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는 소장품도 최고의 것이었으며 때로는 외교사절로 활약하며 당대를 풍미했던 인물이다.

 

그의 이와 같은 배경의 자신감은 왕과 같은 품위를 지닌 [자화상]에서 반영되고 여유 있는 생활과 인품은 정신적인 면에서 휴머니즘과 평화를 주도하려는 한편 구체적 회화양식에서 풍요롭고 꽉 찬 구성과 아름답고 화려한 관능과 호사스러운 취향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매우 다작이어서 그의 모사품이 많은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 뿐 아니라 다양한 화풍과 주세를 망라하고 있다.

 


 

 



Daniel in the Lion's Den
c. 1615
Oil on canvas, 224 x 330 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Juno and Argus
c. 1611
Oil on canvas, 249 x 296 cm
Wallraf-Richartz Museum, Cologne

 

 

 

 

 



The Drunken Hercules
c. 1611
Oil on oak panel, 220 x 220 cm
Gemaldegalerie, Dresden

 

 

 

 



The Abduction of Ganymede
1611-12
Oil on canvas, 203 x 203 cm
Schwarzenberg Palace, Vienna

 

 

 

 

 


Venus, Cupid, Baccchus and Ceres
1612-13
Oil on canvas, 141 x 200 cm
Staatliche Museen, Kassel

 

 

 

초기작들은 대체로 고전적이고 선적인 조심스러운 경향이 있으나 역동적이고 유기적 관계의 긴장감 있는 구성은 바로크의 특징적인 면이 드러난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는 강한 하이라이트가 예수의 신체에 집중되고 염려하는 인물들의 표정이 유기적 관계의 구성이다.

 

깊고 요동하는 대각선의 처형에 지친 인물과 주위의 고뇌 등은 그 표현에서 분명히 바로크적이라고 하겠다. [루시퍼스의 딸들의 능욕]은 그의 회화의 정수이자 찬란한 색채 효과, 관능성, 긴장되고 열린 공간으로서 그의 특징이 두드러진다. 백색의 여체와 구릿빛 남자의 근육의 대비, 반항하는 격렬한 몸짓과 울부짖는 말은 곡선적이고 꾸물거리는 선들이 그 특징이라고 하겠다.

 

[마르세이유에 도착한 마리 드 메디치]는 그녀의 일생의 연작 중 하나로 우와 같은 특징의 결정적이며 환락과 풍요 관능이 더하여 [사랑의 정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가 그리는 방식은 수많은 이들이 그리면 그가 명암의 균형과 최종적인 구성에 주된 리듬과 악센트를 주는 방식으로 다작이 가능했으며 그는 자신의 생각을 빠른 속도로 스케치하여 아이디어를 담는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말년에 이르러 그는 새로운 아름다운 부인에게서 새로운 영감을 받아 신화적이고 육감적인 누드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노년의 눈으로 다채로운 풍경화를 그렸다. [스텐성]은 그의 화려한 필치가 살아 있는 자연 풍경에 주목하게 하고 명암법과 임파스토의 하늘은 멀리 터너를 예감케 하고 있다. 루벤스는 자신의 미술을 판화를 통해 성공적으로 널리 전파시켰으며 판화의 보급에 영향을 미치고 이후 로코코의 와토, 게인즈보로, 낭만주의 들라크루아, 인상주의 르누아르까지 여러 작가들에게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

 

 

 



St James the Apostle
1612-13
Oil on panel, 108 x 84 cm
Museo del Prado, Madr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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