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이야기

[스크랩] 이제 정말 교회가 해야 할 운동

쟝리 2010. 7. 27. 12:34

이제 정말 교회가 해야 할 운동
2009년 03월 30일 (월) 08:10:38 장경덕 canaan@kornet.net


오래된 유머 중에 이런 얘기가 있다. 학생, 수도자, 정치가를 태운 비행기가 갑자기 기관 고장이 났다. 추락 직전에 조종사가 “불행히도 우리에게는 낙하산이 세 개뿐인데 나는 사고를 보고해야겠기에 먼저 내려갑니다” 하고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렸다. 그러자 “정치가도 나도 인류를 위하여 크게 공헌해야 합니다” 하면서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렸다. 수도자는 학생에게 “얘야, 나는 살 만큼 살았으니 네가 낙하산을 가져라”고 하니까 학생이 “염려마세요. 두 번째 뛰어내린 분은 제 짐 보따리를 갖고 뛰어 내렸습니다” 하더란다. 양보하지 않고, 나만을 위해 사는 사회의 모습을 유머에 담아 표현해 준 것이리라.

우리사회에서는 ‘양보는 곧 패배’라는 등식을 갖고 있는 듯이 보인다. 미국에서 차를 운전할 때는 차선을 바꾸려고 깜빡이를 켜면 10대 중에 9대는 비켜준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깜빡이를 켜고 들어가려면 멀리 있던 차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더 바짝 대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아마도 10대 중 1,2대만 양보해주는 것 같다. 그러기에 아예 차선을 바꿀 때는 깜빡이를 켜지 않고 그냥 들어가려다 욕을 하고, 또 받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화인 것처럼 되어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들에게는 여유가 부족해 보인다. 아마도 인구에 비해 좁은 국토에서 생존하기 위한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실은 먼저 간다고 해도 그리 빨리 갈 수 있는 길도 아니다. 그렇게 여유 없이 달려도 결국은 5분, 10분이 될 것이다. 좀 더 멀리 보면 좀 더 여유 있게 살 수 있고, 풍성한 마음을 갖고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여유가 삶의 크고 작은 일들에도 연결됨에 틀림없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나누려는 정신을 가지면 많은 사회적인 갈등을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용산 사태를 생각해보면 ‘가진 자’는 세입자들에게 좀 더 주려는 마음이 아쉽고, 세입자들은 조금만 더 받으면 그것으로 감사할 줄 아는 여유를 말한다면 너무 나이브(naive)한 생각일까?

이런 얘기가 떠오른다. 노부부가 평화롭고 아름답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 때 남편이 아내에게 “여보, 우리는 한 번도 싸우거나 다툰 일이 없는데 싸우면 정이 더 깊어진대요. 우리도 한번 싸워봅시다” 했더니 “그래요. 그렇게 해 봅시다”고 하면서 싸우기로 합의를 했다. 먼저 남편이 아내 지갑을 갖고는 “이거 내거야!” 하고 고집피우려 한다. 이 때 아내가 “이게 당신거라구요? 그럼 가지시구려” 했더니 두 사람은 웃으면서 “우리는 싸움도 못하네” 했단다.

국회에서 여야의 싸움을 보는 것에 국민들은 식상해 있다. 필자는 한 국회의원을 만나서 “왜 그렇게 싸우느냐? 여러 가지 법을 한꺼번에 통과시키려 하지 말고 딜(deal)을 하려는 시도가 필요하지 않느냐?”고 말한 적이 있다. 완승을 거두려는 자세보다는 함께 윈윈하려는 정신이 더 중요함을 인정하라는 주문이었다.

이런 자세는 우리들이 속해 있는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필요하다고 본다. 미국의 한 설문조사에서 이혼율을 분석한 중에 불신자들의 이혼율이 23%였는데 반해 교회 다니는 신앙인의 이혼율은 27%였고, 특별히 자신들이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주장하는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들의 이혼율은 30%에 달했다고 한다. 미국사회이기는 하지만 아마도 우리들도 비슷할 것으로 보인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 관용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반대로 자신에게는 관용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잣대로 살다보면 결코 양보하거나 남을 배려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기독교는 도덕과 윤리 이전에 ‘은혜의 종교’이다. 은혜가 없이는 도덕도 윤리도 의미가 없다.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을 은혜로 용서해 주었다. 은혜가 있은 후에 주님은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고 하셨다. 은혜를 통한 용서, 은혜를 통한 도덕과 윤리, 은혜를 통한 양보가 나올 수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러기에 세상 사람들보다 더 많이 양보할 수 있는 조건도 충분하게 갖추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 링컨은 “시비를 가리느라고 개에게 물리느니보다는 차라리 개에게 길을 양보하는 것이 현명하다. 개를 죽여보아도 물린 상처는 치유될 수 없는 법이다”라고 했다. 양보 없이 개와 다투다가 사람이 상처를 입는 것보다는 양보하는 것이 큰 지혜로움이라는 것이다.

우리사회의 가치관은 ‘지식’이 아니라 ‘덕’(德)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인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교회들마다 성숙한 자세로 이런 운동을 펼쳐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일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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